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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에서 만난 한 어르신

✍️ 김순원 목사님2026년 9월 6일

1. 요즘 참 날씨가 좋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스치는 바람결이 서늘해지면 자연스레 마음은 고향으로 향하고, 고향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립고 애틋한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그 시절, 고단한 농사일 속에서도 부모님께는 숨을 고를 수 있는 각자의 ‘아지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지트는 아랫집 ‘곤이네’ 사랑방이었습니다.

그 집 아들 이름이 ‘재곤’이라 그렇게 불렀는데, 흙벽으로 지은 토담집 특유의 온기가 참 따뜻하고 아늑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그 방 문턱을 넘나들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어머니의 아지트는 뒷집 ‘보태네’ 사랑방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일찍이 텔레비전을 들여놓았던 그곳은 어머니들의 소박한 해방구였습니다.

저녁이면 옹기종기 모여 일일 연속극을 보았고, 찐 고구마와 감자, 구수한 강냉이 같은 먹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곤이네와 보태네 사랑방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서로의 온기로 고단함을 달래던 부모님만의 숨자리였습니다.

2.

제게도 부모님의 사랑방 같은 든든한 아지트가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늦은 오후에 찾는 ‘효신전원교회’입니다.

넓은 마당에는 포도, 매실, 앵두 같은 과실수가 자라고, 철마다 피어나는 고운 꽃밭과 푸른 금강송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늑한 곳입니다.

게다가 족구장까지 갖춰져 있어 목회자들의 쉼터로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7~8명의 목사님들이 모여 족구한 판에 땀을 흘리고, 서로의 목회와 삶을 나누어 온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각자 교회 행사에서 챙겨온 수건이나 소소한 선물을 나누고, 효신전원교회 어떤 집사님은 사랑 가득한 따뜻한 간식과 다양한 선물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지트는 주는 기쁨과 받는 감사가 넘쳐나는 참 풍성한 자리입니다.

3.

아지트에는 갈 때마다 늘 온화하게 맞아주시던 귀한 어르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담임이신 임 목사님의 장인어른이셨는데, 80대 후반의 연세에도 참 건강하셨던 분입니다.

사위가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궂은일을 도맡아 헌신하셨고, 교회를 월문리로 옮긴 후에는 어르신의 손길이 더 바빠졌습니다.

넓은 마당의 잡초를 매고, 가을 낙엽을 쓸어내고, 텃밭의 상추와 고추를 돌보는 일은 언제나 어르신의 몫이었습니다. 묵묵히 흘리신 그 성실한 땀방울 덕분에 교회는 늘 단정하고 포근했습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어르신은 교회를 돌보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령의 연세에 무리가 되셨던 탓인지 결국 자리에 쓰러지셨고, 급히 찾은 병원에서 폐렴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한 달여간 회복을 위해 애를 쓰셨지만, 다시 일어나시기에는 기력이 너무 쇠하여 계셨습니다.

가족들은 고심 끝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대신,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평안히 보내드리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가족들의 기도와 찬송 속에 드려진 마지막 예배는 슬픔 속에서도 천국 소망으로 가득한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마음에 새긴 채 조용히 가족의 곁을 떠나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4.

부고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문상갔습니다. 어르신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어르신의 영정 앞에서 뵐 때마다 항상 교회를 돌보시던 바지런한 손길과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반겨주시던 믿음의 삶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묵묵히 달려가셨던 어르신의 걸음은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땅에서의 아름다운 소풍을 잘 마치신 어르신. 이제는 수고와 아픔을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가장 따뜻한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